인제 가을꽃축제, 원통장에서 인심을 사고 박인환의 가을을 걷다
강원도 고성으로 가는 날이었다.
마침 날짜가 원통 장날과 맞았다.
나는 여행하다 오일장을 만나면
웬만해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특히 요즘처럼 수확철에는 더 그렇다.
직접 농사지은 콩이며 깨며 채소를
조금씩 가지고 나온 할머니들이 보인다.
많이 팔아 큰 돈을 벌겠다는 것보다
직접 농사지은 걸 내다 팔아
손주 용돈이라도 주시려는 것 같은 모습이
괜히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가능하면 할머니들이 내놓은 것을 산다.
그리고 그런 데서는 값을 깎지 않는다.
그날도 그랬다.
들기름 한 병을 샀는데 인심이 두 봉지 따라왔다
시장 한쪽에서 곡식과 기름을 파는 분을 만났다.
직접 농사지은 깨를 방앗간에 가져가 들기름을 짜왔다고 했다.
1.8리터 페트병 안에 짙은 색의
들기름이 들어 있었다.
내가 한 병 달라고 하니 깨끗이 씻어둔
소주병을 꺼내 기름을 따라주셨다.
“기름집에서 파는 병은 이것보다 작아.
가격은 똑같이 2만5천 원 받아.”
소주병이 오히려 더 많이 들어간다며
꾹꾹 채워주셨다.
나는 값을 깎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들기름 한 병을 샀다.
그런데 옆에 말린 호박이 보였다.
“이건 어떻게 먹어요?”
호박죽을 끓여 먹는 거라고 하셨다.
마침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계신데 호박죽 한번 끓여드리고 싶네요.”
그 말을 들으시더니 말린 호박을 봉지에 담아주셨다.
한 봉지가 아니었다.
두 봉지였다.
“이거 얼마예요?”
그랬더니 손을 내저으셨다.
“아이, 그냥 가져가. 어머니 호박죽 해드린다면서.”
그 순간 마음이 푸근해졌다.
콩 한 대접을 샀더니 한 대접이 더 왔다
다른 할머니에게서는 콩을 샀다.
한 대접 정도를 샀는데
다시 한 대접만큼을 더 담아주셨다.
“이거 남았어. 나 이것만 팔고 갈 거야.
그냥 갖고 가.”
돈을 더 드리려고 해도 됐다고 하셨다.
시골 장터에서는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내가 산 것보다 받은 것이 많아진다.
콩도 사고, 들기름도 사고, 고들빼기도 샀다.
그 고들빼기는 집에 돌아와서
난생 처음 고들빼기 김치까지 담갔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날 원통장에서 산 것은
콩이나 들기름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시골장에 가서 무언가를 산다는 건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인심을 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돈을 쓰고 나왔는데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받은 것 같은 기분.
그래서 나는 시골 장이 좋다.
참고로 원통장은 매달 끝자리가 2와 7인 날에
오일장이 선다.
10월 17일도 마침 장날이었다.
“가는 길인데 꽃이나 좀 보고 갈까?”
원통장을 나와 다시 고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인제에서 가을 꽃 축제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는 길인데 한번 보고 갈까?”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인제에서 하는 지역 꽃 축제라고 하니
작은 동네 축제 정도로 생각했다.
국화 화분 몇 개 놓아두고,
포토존 좀 만들어 놓았겠지 싶었다.
그 생각은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틀렸다는 걸 알았다.
주차 안내 요원이 많았다.
차를 계속 안쪽으로 유도했다.
한참을 돌아 들어가는데도
주차장이 계속 이어졌다.
“아니, 여기 작은 축제 아닌가 본데?”
그리고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많았다.
정말 많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막상 축제장에 들어가니
답답하게 붐빈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이유는 들어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축제장이 정말 컸다.
꽃밭을 보는 순간, 규모부터 달랐다
빨강, 노랑, 분홍, 보라.
색깔별로 나뉜 꽃밭이 산 아래 넓게 펼쳐져 있었다.
화분 몇 개를 가져다 놓은 축제가 아니었다.
땅에 직접 꽃을 심고 길을 내고 정원을 만들었다.
올해 축제는 인제 북면 용대 관광지에서 열렸고
국화·구절초·마편초·해바라기 등을 이용해
여러 테마의 정원을 꾸몄다.
원래 10월 11일까지 예정됐지만
꽃이 절정을 이루면서 18일까지 연장됐다.
내가 찾은 17일은 사실상 마지막 주말이었다.
입장도 무료였다.
나중에 축제가 끝나고 보니
올해 방문객이 무려 34만6,759명이었다.
내가 주차장부터 놀랐던 이유가 있었다.
올해 꽃밭의 주인공은 박인환이었다
축제장 안으로 들어가자 한 사람의 얼굴이 계속 등장했다.
박인환.
박인환은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올해가 정확히 탄생 100주년이다.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으로
잘 알려진 한국 모더니즘 시의
대표 시인이다.
그래서 올해 인제 가을꽃축제에는
아예 ‘박인환 낭만정원’이 만들어졌다.
꽃만 전시한 것이 아니라 시인의 삶과 작품을
여러 조형물과 공간으로 풀어놓았다.
꽃밭 한가운데 커다란 100주년 케이크가 세워져 있었다.
‘인제 사람 박인환.’
꽃 축제 한가운데에서
문학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맞아, 이거 외웠었지”
전시를 보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이 갑자기 떠올랐다.
「목마와 숙녀」.
처음부터 기억난 건 아니었다.
설명을 읽다가 그 유명한 첫머리가 보였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그 순간 기억이 확 돌아왔다.
“아, 맞아. 이거다.”
고등학교 때 시험 때문에 외웠던 시였다.
그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부터 낯설었다.
“이 사람은 또 누구야?”
시도 외워야 하는데 작가와 문학사까지
외울 게 많으니 친구들끼리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때 시험을 위해 외웠던 시인을
수십 년이 지나 그의 고향에서 다시 만났다.
그것도 교실이 아니라 꽃밭 한가운데에서.
묘한 기분이었다.
꽃밭 한가운데 영화 세트가 있었다
박인환을 표현한 방식도 재미있었다.
단순히 시 구절을 현수막에 적어 놓은 것이
아니었다.
영화 클랩 보드 모양의 커다란 프레임도 있고,
박인환의 옛 사진을 필름처럼 세워 놓은 공간도 있었다.
나도 의자에 앉아 한 장 찍었다.
사진만 보면 무슨 영화 한 장면 같다.
박인환 하면 떠오르는 ‘모던’한 분위기를
꽃밭 안에서 꽤 재미있게 풀어놓았다.
조금 더 걸어가니 거대한 축음기도 나타났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붉고 분홍이고 노란 국화가 넘실거렸다.
꽃축제가 단순히 꽃이 많은 곳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느낌이었다.
꽃밭에 이야기를 심어 놓았다.
나는 이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백합도 좋았지만, 내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버베나였다
꽃은 정말 다양했다.
흰색과 노란색, 진한 자주색 백합이 한꺼번에 피어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백합은 존재감이 크다.
꽃잎 하나하나가 크고 선명하다.
그런데 이날 내가 가장 오래 서 있던 곳은
백합밭이 아니었다.
버베나였다.
버들마편초라고도 부르는 꽃이다.
멀리서 처음 봤을 때 느낌이 참 좋았다.
꽃 한 송이 한 송이는 작다.
줄기도 가늘다.
그런데 수없이 많은 꽃이 한꺼번에 모이니
분홍과 보라 사이의 색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면 그 넓은 꽃밭이 같이 움직였다.
“야, 이거 느낌 정말 좋다.”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다른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아, 맞다. 이맘때가 핑크 뮬리 철이지.
꽃이 다음 여행을 불렀다.
‘다음 주에는 핑크 뮬리 보러 가야겠다.’
여행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여행을 생각했다.
아마 그래서 계속 돌아다니나 보다.
꽃은 가까이서도 좋고, 멀리서도 좋았다
인제의 꽃밭이 좋았던 이유는
꽃만 있는 게 아니어서였다.
꽃밭 뒤에 소나무가 있고,
그 뒤에 다시 산이 있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정원인데도
주변의 산과 잘 어울렸다.
그래서 사람은 많았는데도 답답하지 않았다.
꽃밭 사이를 걷다가
나무 그늘에서 쉬는 사람도 있었다.
사진 찍을 장소도 충분했다.
한쪽에는 해바라기도 가득했다.
파란 가을 하늘과 노란 꽃.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조합이었다.
작은 지역축제라고 생각했던 게 미안해졌다
축제장을 거의 다 보고
다시 고성으로 출발하면서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이거 작은 축제인 줄 알았잖아.”
생각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규모만 큰 게 아니었다.
주차부터 동선, 꽃밭 구성, 포토존, 박인환이라는
문학 콘텐츠까지 꽤 많은 공을 들인 게 보였다.
무엇보다 무료였다.
꽃을 많이 심어놓은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어디에서 사진을 찍고, 어디에서 쉬고,
무엇을 기억하고 돌아갈지를 꽤 고민한 축제 같았다.
나는 축제를 좋아해서
전국에서 열리는 행사들을 꽤 많이 다녀본다.
그래서 예전보다 우리나라 지역 축제들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어디든 비슷한 천막을 치고
먹거리 몇 개 파는 축제에서 벗어나,
그 지역의 사람과 이야기와 자연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축제가 많아졌다.
인제 가을 꽃 축제도 그랬다.
그날 가장 오래 남은 것은 꽃보다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날을 다시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꽃밭이 아니다.
원통장의 할머니다.
들기름을 소주병에 가득 따라주시던 손.
어머니 호박죽 끓여드리라며
말린 호박 두 봉지를 그냥 넣어주시던 모습.
콩을 샀더니 남은 것까지 몽땅 더 담아주시던 할머니.
그리고 몇 시간 뒤에는 수십만 송이 꽃 사이를 걸었다.
시골 장터와 대형 꽃 축제.
전혀 다른 장소인데 이날 내 여행에서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아침에는 사람의 인심을 만났고,
낮에는 꽃을 만났고,
꽃밭에서는 오래전에 배웠던 시인을 다시 만났다.
목적지는 고성이었다.
원통장도,
인제 가을 꽃 축제도,
원래 여행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행이 끝나고 나니
오히려 이런 장면들이 오래 남았다.
계획한 곳을 찾아가는 것도 여행이지만,
가는 길에 뜻밖의 무엇을 만나는 것.
아마 나는 그 맛 때문에 계속 길을 나서는 것 같다.
방문 정보
2026 인제 가을 꽃 축제는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 용대관광지 일원에서 열렸다.
당초 9월 24일부터 10월 11일까지 예정됐지만
꽃이 절정을 이루면서 10월 18일까지 연장됐다.
운영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기본 관람료는 무료였고 일부 프로그램만 유료였다.
올해는 박인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박인환 낭만정원’을 비롯한
네 가지 테마 공간이 마련됐다.
올해 최종 방문객은 34만6,759명으로 집계됐으며
2년 연속 30만 명을 넘었다.
원통시장은 매월 2·7·12·17·22·27일에
오일장이 서기 때문에 인제·속초·고성 쪽을 여행한다면
날짜를 맞춰 함께 들러볼 만하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