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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다시 찾게 되는 곳, 태안 청산수목원 팜파스와 핑크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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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면 생각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어디 단풍이 예쁘다더라, 어디 억새가 좋다더라  하는 곳도 있지만 몇 년 전부터 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곳이 하나 있으니 바로 태안의 청산 수목원이다. 처음 간 건 아마 4년 전 쯤 이었던 것 같다. “가을에 어디 경치 좋은 데 없을까?” 그렇게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그때는 혼자 갔다. 별 기대 없이 찾아갔는데 생각보다 참 좋았다. 그래서 그 뒤로 가을이 되면 다시 생각났다. 이번이 세 번째인지 네 번째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만큼 여러 번 찾았다. 유명하다고 한 번 가보는 곳과  계절이 돌아오면 다시 생각나는 곳은  조금 다르다. 청산 수목원은 내게 후자다. 입구부터 “이제 다른 세계로 들어갑니다” 청산 수목원은 들어가는 순간부터 분위기를 만든다. 양쪽으로 높게 늘어선 나무 사이에 길이 나 있다. 나는 갈 때마다 이 길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한다. ‘자, 지금까지 왔던 곳은 여기까지.’ ‘이제부터는 조금 다른 세계로 들어갑니다.’ 마치 수목원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길을 천천히 걸으면 실제로 일상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느낌이 난다. 그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책의 한 페이지처럼 만들어 놓은  공간이 나온다. 나는 이곳이 특히 마음에 든다. 책의 한 페이지를 넘겨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그곳을 통과하면서 부터는  정말 책 속에 그려진 가을 정원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청산 수목원은 아주 거대한 수목원은 아니다. 대신 이런 작은 연출들을 오밀조밀하게 잘 만들어놨다. 걷는 사람이 장면을 하나씩 발견하도록 만든 곳이다. 나는 핑크뮬리보다 팜파스가 더 좋다 청산 수목원 하면 핑크뮬리를 많이 떠올린다. 물론 예쁘다. 가을 햇살 아래 넓게 번진 분홍빛을 보고 있으면  계절이 정말 눈앞에 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팜파스가 더 좋다. 핑크뮬리는 이제 꽤 유명...

인제 가을꽃축제, 원통장에서 인심을 사고 박인환의 가을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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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으로 가는 날이었다. 마침 날짜가 원통 장날과 맞았다. 나는 여행하다 오일장을 만나면  웬만해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특히 요즘처럼 수확철에는 더 그렇다. 직접 농사지은 콩이며 깨며 채소를  조금씩 가지고 나온 할머니들이 보인다.  많이 팔아 큰 돈을 벌겠다는 것보다  직접 농사지은 걸 내다 팔아  손주 용돈이라도 주시려는 것 같은 모습이  괜히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가능하면 할머니들이 내놓은 것을 산다. 그리고 그런 데서는 값을 깎지 않는다. 그날도 그랬다. 들기름 한 병을 샀는데 인심이 두 봉지 따라왔다 시장 한쪽에서 곡식과 기름을 파는 분을 만났다. 직접 농사지은 깨를 방앗간에 가져가 들기름을 짜왔다고 했다. 1.8리터 페트병 안에 짙은 색의  들기름이 들어 있었다. 내가 한 병 달라고 하니 깨끗이 씻어둔  소주병을 꺼내 기름을 따라주셨다. “기름집에서 파는 병은 이것보다 작아.  가격은 똑같이 2만5천 원 받아.” 소주병이 오히려 더 많이 들어간다며  꾹꾹 채워주셨다. 나는 값을 깎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들기름 한 병을 샀다. 그런데 옆에 말린 호박이 보였다. “이건 어떻게 먹어요?” 호박죽을 끓여 먹는 거라고 하셨다. 마침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계신데 호박죽 한번 끓여드리고 싶네요.” 그 말을 들으시더니 말린 호박을 봉지에 담아주셨다. 한 봉지가 아니었다. 두 봉지였다. “이거 얼마예요?” 그랬더니 손을 내저으셨다. “아이, 그냥 가져가. 어머니 호박죽 해드린다면서.” 그 순간 마음이 푸근해졌다. 콩 한 대접을 샀더니 한 대접이 더 왔다 다른 할머니에게서는 콩을 샀다. 한 대접 정도를 샀는데  다시 한 대접만큼을 더 담아주셨다. “이거 남았어. 나 이것만 팔고 갈 거야.  그냥 갖고 가.” 돈을 더 드리려고 해도 됐다고 하셨다. 시골 장터에서는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내가 산 것보다...

행주가 예술이야, 한옥성당에서 행주산성 별빛 공연까지 걸었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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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토요일, 공연을 좋아하는 친구와 행주로 갔다. 목적지는 저녁에 열리는  2026 고양 국가유산 야행 ‘행주가 예술이야’였다. 그런데 공연 시간에 맞춰  바로 행주산성으로 가기에는 조금 아쉬웠다. 행주는 산성만 보고 돌아오기보다  천천히 걸었을 때 더 많은 것이 보이는 동네다. 그래서 낮부터 움직였다. 이날 축제는 10월 9일부터 18일까지 열리는 행사였고,  내가 간 10월 10일은 오후 6시 30분부터  개막 특별공연 이 예정되어 있던 토요일이었다.  공식 운영시간은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다. 고양시청 축제에 가기 전, 꽃밭에서 잠깐 멈췄다 행주 산성으로 가기 전  코스모스가 한창 핀 꽃밭에 먼저 들렀다. 가을 햇빛 아래 분홍색과 흰색 꽃이 빽빽하게 피어 있었다. 이날 하루가 밤 축제를 보러 가는 일정이라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발이 붙잡혔다. 굳이 오래 머물 필요는 없었다. 꽃 사이에 잠깐 서서 사진 한 장 찍는 것만으로도  계절을 제대로 만난 기분이었다. 1910년에 지어진 행주성당, 아직도 미사가 이어진다 다음은 행주 성당 이었다. 고양에 오래 살았어도 이곳을 모르는 사람이 꽤 있을 것 같다. 행주 성당은 1910년에 지어진 한옥성당이다. 1928년 지금 자리로 옮겨졌고, 1949년 증축을 거쳤다.  2015년에는 옛 사진을 참고해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문화재청 새 성당 바로 옆에 오래된 한옥 성당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기와 지붕 아래 나무 기둥과 창문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서양식 성당과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가장 마음에 남은 장면은 건물 자체가 아니었다. 안에서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백 년이 넘은 건물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백 년이 넘은 공간이 지금도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 을 보고 있었다. ...

제주 자전거 일주 마지막 날, 일출 보며 세화에서 제주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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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날 밤, 선권이 형과 약속했다. “내일은 꼭 일찍 일어나자.” 이번 제주 자전거 여행에서 일출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대신 전날 저녁의 노을은 아주 좋았다. 붉게 물드는 제주 하늘을 보고 나니 다음 날 아침도 욕심이 났다.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 있다. 하나는 해가 뜨기 직전부터 아침빛이 퍼지는 시간. 또 하나는 해가 지기 시작해 세상이 조금씩 어두워지는 시간이다. 낮에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지만, 그 두 시간만큼은 자꾸 자전거를 세우게 된다. 오전 5시 10분, 아직 제주가 깨어나기 전 알람을 맞춰놓고 잤다. 오전 5시 10분. 눈을 뜨자마자 몸이 무겁기는 했다. 며칠째 계속 자전거를 타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래도 이날만큼은 다시 잘 수 없었다. 마지막 날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 깜깜했다. 자전거 라이트가 길바닥을 비췄다. 주변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끔 가로등 하나가 나타났다가 뒤로 사라졌다. 이렇게 어두운 길을 일부러 달리는 이유는 하나였다. 해 뜨는 시간을 길 위에서 만나고 싶었다. 소로는 《월든》에서 이렇게 썼다. “아침은 하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이며,  깨어나는 시간이다.” 실제 원문은 “The morning, which is  the most memorable season of the day,  is the awakening hour.”이다.  나는 《월든》을 읽을 때 소로의 이 문장을 참 좋아했다. 책에서 읽을 때도 좋은 문장이었지만,  그날 새벽에는 그 말이 이상할 만큼  가슴에 와닿았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길을  자전거 라이트 하나에 의지해 달리다가,  바다 끝이 조금씩 밝아지고  하늘에 붉은빛이 번지는 순간을 직접 보고 있으니  그 문장이 더 이상 책 속 문장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밤이 걷히고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나도 함께 깨어나는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쌓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