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만회고택 숙박 후기 1|눈부신 광목 이불과 정이 많은 선비
오후 다섯 시 쯤 만회고택에 도착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계세요?”
한 번 불러보고, 또 한 번 불러봤다.
대답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묵는 팀이 네댓 팀은 있었는데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 모양이었다.
사람이 없으니 집은 더 조용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깐 어디 나가셨나.’
사람을 찾아 집 안팎을 기웃거리다가 뒷마당으로 돌아갔다.
그때 빨랫줄에 널린 이불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이불이었다.
그런데 그냥 흰색이 아니었다.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실 만큼 밝은 광목의 흰색.
깨끗해서 속이 비칠 것 같은, 옛날 사람들이 백의민족이라고 했던 그 흰색이
이런 색이었을까 싶은 빛이었다.
이불들이 볕 아래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 여기서는 침구를 이렇게 햇빛에 말리는구나.’
요즘 같으면 세탁하고 건조기에 넣으면 그만일 텐데,
이 집에서는 손님이 덮을 이불을 볕에 내어 말리고 있었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정이 많은 선비 한 분을 만났다
전화를 드렸더니 주인어르신이 “금방 가겠다”고 하셨다.
잠시 후 나타난 어르신은 평범한 옷차림이었는데 어딘가 범상치 않은 느낌이 있었다.
방을 안내해주시더니 갑자기 말씀하셨다.
“사진 좀 찍어드릴게요. 이리 와보세요.”
조금 당황했다.
연세가 있으신 분이 사진을 찍어주신다니 솔직히 처음에는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르신이 나를 꽃 앞에 세워놓고 본인은 꽃 뒤로 돌아가셨다.
찰칵.
이번에는 누각으로 데리고 가셨다.
“여기 한번 서보세요.”
또 찰칵.
연꽃이 있는 곳에서는 아예 연꽃 뒤쪽으로 돌아가 사진을 찍으셨다.
그리고 찍을 때마다 사진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사진을 보고 조금 놀랐다.
‘어? 이분 뭐지?’
사진이 너무 좋았다.
사람이 서는 위치, 꽃과 사람의 거리, 뒤쪽 풍경,
햇빛이 들어오는 각도까지 알고 찍는 사람의 사진이었다.
그냥 휴대전화를 들고 셔터만 누르는 사진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유를 조금 알게 됐다.
예전에는 직접 글도 쓰고 사진도 올리셨다고 했다.
사람들이 좋아요도 많이 눌러주고 댓글도 많이 달아줬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귀찮아서 잘 안 하신다고 웃으셨다.
사진과 글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무엇보다 자기 집을 찾아온 사람에게 좋은 기억 하나라도
더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그분을 이렇게 기억하고 싶다.
정이 많은 선비.
명월루에 앉으니 가까운 풍경부터 먼 풍경까지 열렸다
만회고택의 사랑채에는 명월루가 있다.
그곳에 앉으면 풍경이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가까이에는 잘 가꾼 화초와 연못이 있다.
연못에서는 꽃대가 높이 올라온 연꽃이 피어 있었다.
그 너머에는 낮은 담장과 마을이 보이고,
시선을 조금 더 멀리 보내면 산자락이 펼쳐진다.
가까운 풍경, 중간 풍경, 먼 풍경이 차례로 겹쳐졌다.
그냥 가만히 앉아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이런 호사를 누리는구나.’
주인어르신은 집안과 마을 이야기, 풍수와 조상들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 집에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인물들이 나왔고, 집안과 지역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
설명하는 말에는 자기 집에 대한 마음이 배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래된 기둥과 마루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저 오래돼서 보존해야 하는 집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공부했고, 누군가는 글을 썼고, 누군가는 나라의 앞날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이 바라봤을 산과 마을을 나도 같은 자리에서 보고 있었다.
낮에 보았던 그 이불을 밤에 덮었다
밤이 되었다.
방에 들어가 이불을 펴는데 낮에 뒷마당에서 보았던 빨랫줄이 다시 떠올랐다.
바로 그 볕을 먹고 마른 이불이었다.
보송보송했다.
그런데 단순히 보송한 것하고는 조금 달랐다.
살갗에 닿는 느낌은 매끄럽고, 햇빛에 오래 말린 이불 특유의 냄새가 났다.
그 순간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돌아왔다.
어렸을 때 할머니가 이불을 햇볕에 널어 말려주시던 때였다.
저녁이 되어 그 이불을 덮으면 나던 냄새.
‘아, 이 냄새였는데. 이 느낌이었는데.’
수십 년 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이불 한 장 때문에 돌아왔다.
낮에 보았던 햇살의 따뜻함이 밤까지 이불 속에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밤, 만회고택은 더 이상 그냥 오래된 집이 아니었다.
하룻밤 묵는 집이 아니라, 오래된 기억 하나를 다시 꺼내준 집이 되기 시작했다.
다음 이야기
다음 날 아침에는 알람이 아니라 빛이 먼저 들어왔다.
창호지를 통과한 햇빛, 주인 내외가 차려준 아침밥, 다시 먹고 싶은 옥수수.
그리고 마루에 앉아 오래된 집을 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나는 앞으로 그렇게 살 수 있을까.’
2편에서는 만회고택에서 맞은 아침과,
이 집에서 하루를 살아보고 난 뒤 남은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봉화 만회고택 숙박 후기 2|볕 냄새 나는 이불, 창호지 아침 빛 그리고 옥수수
만회고택 여행 실용 정보
- 위치: 경북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1길 51
- 숙박 형태: 전통 고택 객실
- 입실/퇴실: 방문 전 최신 안내 확인 권장
- 예약: 숙박 예약 플랫폼 또는 숙소 문의(저는 카카오맵에서 예약했어요)
- 주차: 집앞에 넓은 주차장 있음
- 참고: 조식·체험·운영 서비스는 시기와 숙소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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